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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① 동 ·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 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7)

by Be_ni 2024. 1. 2.

1. 경세치용학파

실학사상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이에게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실학사상은 유형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초기의 실학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흔히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된 사상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토지의 과점에 있다고 보고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의 소농 민계층을 대변한 양심적인 관료의 사상으로 후에 일부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향한 농촌사회의 이념으로 천주교를 도입하기도 한다.

 

2. 이용후생학파

18세기 중반에 일기 시작한 중기 실학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고도 하는데, 주로 중국을 다녀오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북학파의 홍대용 · 박지원 · 박제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대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 당시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상을 동정하여 이들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 서구과학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자신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반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초기와 중기의 실학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그는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청의 고증학을 이용한 유가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사학泗學(유학)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 · 세계관을 제시했다.

 

3. 실사구시학파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가 바로 '실사구시實事求是학파' 이다. 이 학파는 경서 및 금석 ·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묘하게도 김정희와 가까웠던 중인 계급 학자들에 의해 후일 개화사상과 연결된다. 김정희와 더불어 초 · 중기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당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하는 철학체계를 구성한 학자는 최한기다. 그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되는데, 서구의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리적인 면에서는 유교를 옹호하여 전형적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폈다. 최한기는 경험적인 인식론과 자연과학적인 학문관, 유교적인 윤리관, 정치개혁론 등이 모두 융해되는 방대한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체계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학에 막을 내린다. 그의 기철학은 저서 『기학』에 담겨 있다. 이들 실학사상들은 교조적 주자학을 타파하고, 학문의 중심을 윤리 · 도덕으로부터 정치 · 경제 · 자연에 대한 현실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지배계급의 부패 · 무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 신분제도 등의 봉건사회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이상적인 농촌사회의 건설, 신분 제도 철폐 및 과학기술의 수용 등 여러 가지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았으나,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아 근대적 사상으로까지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 운동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적인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의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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