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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① 동 ·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 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3)

by Be_ni 2024. 1. 1.

1. 원효

한편 그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①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석가 입적 후 1000년 인도 대승불교 철학에 발생한 '공 空· 유'의 대립, ②진眞(출세간의 진리)·속俗(세간의 진리)의 차별 문제였다. 여기서 '공'이란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 데, 중관학파는 공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공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을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이 과제가 중국과 한국의 불교계에 넘어왔는데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원효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에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 一心'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一心二門論인데,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俗諦와 절대적 진리眞諦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신라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 지배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일반민중과 유리되는 모순을 통찰해, 초탈한 행동으로 정토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 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당시의 중국에 수출되어 법장 · 징관 등에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학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2. 의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의상義湘은 원효와는 달리 당에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때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신라로 돌아와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실천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며, 원효의 경우와 같은 방대한 불교사상 체계나, 혹은 지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던 법장이 화엄학의 이론을 집대성했던 것에 비길 만한 학문적 업적은 없다. 그는 법장의 이론적 태도와 구별되게 실천수행에 주력하여, 지엄은 의상에게는 의지, 법장에게는 문지文持의 호를 주었던 것이다.

의상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신라 화엄학의 특징을 이룬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실천 중시 경향은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 발전에 한계가 되어, 새로 대두된 선종의 공격을 받게 되는 나말여초에 이르러서는, 균여로 하여금 다시 지엄이나 법장 등의 중국 화엄학을 재발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상의 제자는 번성하여 진정 · 표훈 등의 이른바 10대 제자가 의상의 뒤를 이어 화엄종을 하나의 종파로서 크게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아, 고려대에 와서 의천에 의해 추앙되기 전까지 그의 사상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화엄종은 신라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일 뿐만 아니라 이후 줄곧 교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 원측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식학唯識學이다. 원측圓測은 어려서 당에 가서 유식이론을 배우다가 후에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서 호법 계통의 새로운 유식이론을 배우고, 유식학의 주요경전의 주석에 힘썼다. 현장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규기와 토론을 벌일 때면 몰려든 스님들로 야단법 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측은 법상종의 정통을 자처하던 규기와 그의 제자 혜소 등에 의해 이단시되어 배척당했다. 따라서 원측의 유식학은 중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신라에 전해져,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 태현 · 경흥 등의 유식학자가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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