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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① 동 ·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 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4)

by Be_ni 2024. 1. 1.

선종의 전래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성립된 것이다. 원래 선종이 들어온 것은 통일 이전부터였다. 즉 달마대사를 제1조로 삼는 중국 선종이 6조 이후 남 · 북종으로 갈라지기 전에 제4조 도신道信의 선禪이 신라의 승려 법랑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어 북종선北宗禪 신행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선종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해 종파로 성립된 것은 821년, 남종선의 법을 도의가 귀국하면서 전한 때부터이다. 그 후 계속해 홍척 · 혜철ㆍ무염 · 도윤 · 현욱 · 범일 등 당에 유학했던 선수의 귀국과 더불어, 마조 문하의 여러 선풍이 각각 전래되면서 국내 각처에 선종 사찰이 세워져 선종 선포의 거점을 이룬 것이 이른바 구산선파九山禪派이다.

통일 후의 신라불교는 화엄학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대국가의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을 때 그 지배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유방식을 극복케 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대두는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적인 지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선승들은 대개 육두품 출신으로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사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을 형성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선승 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후삼국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왕건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학의 전래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설치를 계기로 해서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때 한문문화의 핵심인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 나감에 따라 행정문서 및 외교문서 작성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고,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문에 능통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채용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태학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학박사 이문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에도 박사 고흥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유학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 백제에 비해 늦게 유학을 받아들인 신라에서는 불교로 사상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유교적인 덕목이 상당히 강조되었는데, 원광의 세속오계에 보이는 충효에 대한 강조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보이는 충도忠道에 대한 연마,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자신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신라에 본격적으로 유학이 채용된 것은 신문왕 2년(682) 국학國學이 설치되면서부터인데, 아찬 이하의 한정된 관직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골품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유학자로는 강수와 설총이 있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났고, 유교적인 의리를 강조한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설총은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과 신하의 군주에 대한 참된 충성을 설파하여 당시의 유학이 전제왕권의 획립에 직접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유학자들은 모두 육두품 출신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의 진골귀족들이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던 불교사상에 대해 충효라는 사회적 윤리규범을 내세워 왕권과 결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즉 신라의 유학사상은 왕권과 육두품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시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채용된 국학 출신의 유학자들은 '인'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근거로 한 국왕의 자애와 신하의 충성이 조화된 유교적 전체주의를 신라하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상정하고 지방호족의 할거에 따른 혼란을 충 효라는 윤리의 확보에 의해 수습하려 하였다. 반진골 · 반호족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경향은 최치원 · 김운경 · 김가기 같은 도당 유학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 난다. 그들은 당唐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중국의 역사책에도 이름 이 오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자부심과 유학 자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은 시무책을 올리는 등 유교적인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호족세력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왕권 약화,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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