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선 · 교의 대립발전
신라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게다가 화엄종 내에서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심한 분열상을 나타냈다. 고려 광종은 불교계 혁신을 위해, 당시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키고,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선종은 중국에서 수입해 온 법안을 중심으로 통일하려 했다. 균여를 통 해 화엄종단을 통합케 하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게 했다. 균 여는 중국의 초기 화엄학을 재검토해, 중국의 지엄 · 법장, 신라의 의상의 저서에 대해 주석을 썼다. 균여는 당시 교종의 2대 주류인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는, 이른바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을 폈다.
천태종
광종은 법안종을 후원함과 더불어 중국 천태종에도 유 의해, 제관은 중국에 들어가 천태사교의를 지어 침체되었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제13조가 되었다. 이처럼 광종 때의 교선통합은 천태종과 법안종이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의 개혁정치는 다시 보수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법안이나 천태 좋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했다. 다만 그 융합사상은 뒤에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100년 뒤 왕자 출신 의천은 불교계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보수적인 귀족불교를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3종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화엄 종측에서 등장한 의천은 법상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교관겸수敎觀兼修'와 '지관'을 중시한 그의 교통합은 교리적 발전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여, 그가 죽자 천태종은 곧 쇠퇴하고 선종은 다시 독립하였으며,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열되었다.
조계종
이후 얼마 안되어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불교계에 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선종의 부흥(조계 종의 성립)'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종세력은 무신정권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무 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 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 두하였다. 이는 신라 말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 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인 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 후 점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 ·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정혜쌍수)는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화엄종에서 방계로 취급되는 이통현의 화엄학과, 역시 중국 화엄에서 선교통합을 주장한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국 선종을 위주로 교종과 조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하여 교와 선이 본래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한 천태종보다는 교리적으로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신앙결사운동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피폐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 서 수선사 조직하였고,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과 원감국 를 사 충지에 의해 조계종은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지눌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결사운동은 천태종 내에서도 일어났으니, 요세에 의해 조직된 백련사가 그것이다. 수선사와 함께 무신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결사라 할 수 있는 백련사도 역시 불교계의 혁신과 기층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선사가 기층민보다 지방의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정 토관에 보다 충실하여 기층사회의 교화에 전념하였다.
불교의 타락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적 기운은 몽고간섭 기에 와서 단절되었다.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수선사는 몽고의 억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백련사는 고려왕실 및 원황실元皇室의 원찰願체인 묘련사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균여파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삼국유사』의 일연-然이 이끄는 선종 가지산파가 부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왕실과 원의 후 원을 받으며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나 양주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승려는 세속화되어 혼란한 고려사회를 더 이상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역할을 못하자, 이것이 곧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이 되었다.
유학의 발전
고려시대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학자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실시하였으니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는 이국의 본本이요, 불교는 수신의 본이다"라고 한 최 승로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지배층인 귀족이 문신 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이 크게 융성한 고려 문종 때, '해동공자'인 최충은 9제 학당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하여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와 숙종 때부터 는 관학의 진흥책이 도모되었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니 확실히 하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유학자들 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하여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폭넓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훈고학 사장학에 치중한 고려의 유학은 중기 이후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성리학의 전래
유학이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의 귀족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 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완성한 것으로 한 · 당 시대의 훈고학적 유학 대신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다. 고려는 이미 심성화된 선종의 융성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소개한 후, 백이정이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 박충좌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색 · 이숭인 · 정몽주 · 길재 · 권근 · 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이들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관료 출신의 온건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향리 출신의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는 토지개혁을 점진적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 비판에서도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승려와 사찰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급진파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하 고 불교에 대해서도 사상 자체의 이론적 비판을 통해 불교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결국 고려왕조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과 역성혁명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몽주의 피살과 조선의 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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