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억불정책과 산중불교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일종의 자기 보호책으로서 호불론을 전개하여, 유불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조선초기의 기화 和는 배불론에 대해 호교론을 펴고, 종교적 갈등을 모나지 않게 해소해 공존을 추구하려는 융화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유 · 불 · 도 3교의 일치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 후 명종 때, 문정 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는 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는 융합론을 폈다. 그는 유교의 공자· 순자 및 노자 등 일체의 사상을 불교의 화엄일리 속에 융합시키고, 다시 여기에 선의 요소를 가미해, 교선일치에서 더 나아 가 교선일체를 주장했다. 그 후 휴정休靜과 유정이 등장하여 불교사상을 진작시키고, 승 병을 모집해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정은 유 · 불 · 도 3교가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 같다고 하였다. 기화가 현정론 유교가 에서 불교를 비난한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데 반해, 휴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혀 상대를 비판함이 없이 일체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은 『선가귀감』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화된 유교
고려말 중소 지주계급 출신 사대부들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주자학은 1392년 이성계·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론자들이 조선 왕조를 개창하자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곧 중세적인 조선 봉건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이념이 되었다. 조선초의 주 자학은 고려 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이 허구라고 비판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에 입각한 중세적 세계 관의 확립 및 이에 근거한 새로운 신분질서 체계와 봉건적 도덕 규범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연구된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 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으니 이들이 사림파다.
사림파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부터다. 이 시기에 오면서 왕과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언관직에 기용하였다. 길재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 김일손 등으로 연결되는 이들은 훈척세력의 비리를 맹렬히 공격하였는데,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파들이 반감을 폭발시켜 사화를 일으킨다. 네 번에 걸친 사화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잠재적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 의 위치를 차지했다.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발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다. '주리론'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 이원론의 입장에서 '이' (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 스의 질료와 유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本然의 性)는 순선무악純善無한 것이고 기(氣質性)는 가선가악 것이 한 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김성일 · 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理氣論'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담집』을 지 은 서경덕은 독자적으로 중국의 기철학을 수용하여 기일원론에 입각한 독특한 '기철학'을 완성했다. 주기론은 『성학집요』의 저자 이이李珥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 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기의 변화 · 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하였어며, 정치 · 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 ·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영남과 기호의 두 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예학의 발달
조선유학이 예학 중심의 교조적 주자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 정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통치능력의 상실에 따른 지배계급의 압박과 수탈이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자체의 해체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급의 유학자들은 주자 학적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신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절대 성을 부인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비판적인 동향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 양명학은 명의 왕양명이 일으킨 주관적 실천적인 유학체계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 두는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실학운동
지배계급의 정통 주자학이 끝까지 명분론과 주리론을 고집하는 동안 사상계의 일각에서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 경향이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실학'이라고 부른다. 실학을 담당한 계층은 양반계층 내부의 계급분화와 일부 벌족의 대토지소유로 말미암아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속했지만 현실생활은 일반민중들과 다를 바 없어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수탈상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고, 현실정치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혹은 불우한 관료생활로 끝맺은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주자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학문연구의 방향을 관제 · 병제 · 토지 · 기술 등의 현실문제로 전환하고 이러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동안 지엽적인 지식으로 도외시되었던 구체적인 탐구물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들을 백과전서식으로 탐구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문대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실학자들은 학문 방법에 있어서도 중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허구 성을 폭로하고, 경험적 · 실증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게 된다. 실학자들의 철학사상은 시대와 대변계급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현실의 변혁과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적인 경향과 경험론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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