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관 한 저서로, 최초의 정치학 교과서다.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의 기원과 본질, 민주정 · 귀족정 · 군주정 등 정치체제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리고 그 이 외의 서양 정치학의 초석이 되는 기본개념과 문제들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정치란 무엇이냐가 문제될 때 항상 다시 논의되고 조회되는 서양 정치철학의 고전이다.
생애와 저술활동
만학의 비조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 그리스 최고의 사상가로, 17세기 말까지 서양지성사의 방향과 내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최대제자였으나 사상에 있어 스승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인 스승과는 달리 '현실주의' 적 경향을 보였는데, 이 두 철학자의 긴장과 균형관계는 그리스 철학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흥왕국인 마케도니아의 궁정의사인 니코마 코스의 아들로 부유하게 태어났다. 어릴 적 당시 풍습에 따라 가 업을 잇기 위해 해부학 등 생물학 방면의 연구에 흥미를 가졌는데, 훗날 그의 현실적인 사유체계가 형성된 것도 이러한 유년시절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그의 용모는 키와 눈이 작고, 대머리인 데다가 말까지 더듬어 보잘것이 없었는데, 그는 이 같은 신체적인 결함을 보완하려고 화려 한 의복을 입는 등 남다른 치장을 했다 한다. 성격적으로도 겁이 많고 우유부단하고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0세 전후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작품을 주로 읽었고, 17세 때 아테 네에 진출하여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하였다. 그는 거기 서 학문에 전념하여 젊은 나이에 강의를 맡기도 하였는데, 독서의 폭과 깊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한다. 스승인 플라톤은 이런 학구적인 제자를 총애하여 간혹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할 때면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아카데메이아에서 그는 책벌레 또는 독서광으로 유명했으며,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재능으로 점차 자신의 독자적 입장을 개척하 기 시작하였는데,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대해 스승과 견해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플라톤은 "어미젖을 다 빨아먹고 발로 걷어차는 망아지 같다"고 그를 비난하였다 한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 유명한 "진리와 우애는 함께 사랑할지라도, 우애보다는 진리를 더 존중할 것을 경건은 우리에게 요구한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사로운 인정보다도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카데메이아에서 18년 동안 공부한 후 플라톤이 죽자, 플라톤의 조카가 아카데메이아 원장 자리를 상속했다. 그는 곧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 왕의 왕자인 알렉산더를 3년간 개인지도하게 된 다. 당시 13세의 왕자는 술 마시기 · 말타기 등을 좋아하고 성격이 난폭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곧 염증을 느꼈으나, 왕실의 극진한 대우와 왕자의 개심으로 의욕을 내어 정치학 · 윤리학 · 수학 · 생물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알렉산더를 전통적인 그리스 정신의 상징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교육했는데, 알렉산더는 스승에게 배운 『일리아드』를 항 상 머리맡에 두고 읽었으며, 원정 중에 신기한 동식물을 보면 스승에게 보냈다고 한다.
알레산더가 왕이 된 후 동방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자, 그는 다 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인 '리케이온(Lykeion)'을 열고 무보수로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알렉산더가 보내주는 막대한 연구자금과 연구자료로 리케이온은 아카데메이아를 압도하고 날로 번성하였다. 늘어나는 제자들과 함께 학원 안에서 함께 식사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숲 속을 산책하며 학문을 논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 학파를 '소요학파'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여『오르가』『형 이상학』『정치학』『시학』『니코마코스 윤리학』『영혼론』『자연학』 등 엄청난 저술을 하여 고대 학문체계를 완성하였다. 그의 대부분 의 저서는 이때의 강의노트다.
그러나 그를 돌봐주던 알렉산더가 죽자,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알렉산더의 측근자로 지목되어 고소당했다. 이에 그는 리케이온을 측근에게 인계하고,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몰았던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철학자들에게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저지르지 않도록' 아테네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1 년 만에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거의 모든 서양의 학문분야에 있어 선구자적 역할을 한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정치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문이 그에 의하여 '학'의 원천을 이루었고, 특히 그의 철학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원용되어 중세를 지배하였다.
논리학
그는 『오르가機關』에서 논리학을 집대성하고 있는데, 모든 판단에 작용하는 개념들을 10개의 범주로 구분하 고 3단 논법의 추리형식(연역법의 초기모습)을 체계화함으로써, 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확립하였다. '연역법'이란 과학적 탐구방법의 하나로 '일반적 원리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는 방법으로(후에 데카르트에 의해 비판받음), 영국의 베이컨은 그의 저서 『신기관』(신논리학 Novum Organum)에서 이와 대립되는 '귀납법'을 창시하여 밀이 완성시켰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질료는 다 함께 중요하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우주에 본질적 성격이 부여되는 것이라 하였다.
자연학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자연학』등의 저서에서 그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면서 여기서 4가지 원인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사물이 '그것'으로부터 형상되어지는 것, 즉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동력인 '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 ④ 목적인目的(사물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 있어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에 의하여 자연물이 이루어지고, 자연의 존재는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발전의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질료는 여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즉 디나미스(가능 태)로서 궁극적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궁극적 목적인 엔텔레케이아(완성태), 에네르게이아(현실태)야말로 자연존재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윤리학
만물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적 세계 관'을 폈던 그는 인간의 윤리적 목표를 '행복'이 라 보고, 행복은 '중용'의 덕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 용의 덕은 이성의 작용에 의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적인 인간 관이 그의 철학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나타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그의 윤리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아테네의 국가제도』에 관한 저술로 정치사상의 세계를 세웠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고, 인간의 선은 공공생활 속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윤리학은 정치학과 분리될 수 없고 정 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재산과 가정이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긍정하였으나,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선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아 노예의 존재를 합리화하고 인간불평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후기에 해당하여 사회적 질서가 불안하였던 때이므로, 그는 강력한 1인지배를 희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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