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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② 고전 해제

제 3장 <서양사상> 정치학(3)

by Be_ni 2024. 2. 23.

비판적 평가

플라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년기를 독자적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같은 철학을 둘러싸고 이들은 독자적인 관점과 생각을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상적 대립은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의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는 장면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플라톤이 이상주의자, 이원론, 이데아계와 현상계, 전체주의적 귀족정치주의자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 일원론, 형 상과 질료, 개인지향적 민주주의자의 성격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완성자라는 점, 논리학의 집대성자, 중용에 의한 행복의 실현, 정치학 · 자연학 등 여러 학문들을 체계화했다는 점, 그리고 빈곤은 범죄와 혁명의 양어버이라는 현대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권위는 중세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여성은 본래 열등적 존재라고 믿었던 점 등은 그도 역시 그가 속한 시대적 사고와 인습의 벽을 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광범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 갈릴레이 등에 의해 불가피하게 수정을 받는 등 그의 사상의 일부는 현대에 상당히 뒤지는 경향이 있다.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

 

아카데메이아는 플라톤이 기원전 387년 아테네 교외에 영웅 '아카 데모스'를 모신 숲 속에 세운 학교이며, 리케이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35년 아폴론 리케이오스를 기려 아테네의 숲 속에 설립한 학원이다.

아카데메이아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치는데, 플라톤과 그의 직계 제자들이 활약한 전기 아카데메이아의 철학은 도적적 사변적이었어며, 중기 아카데메이아는 비독단적 회의주의, 후기는 전기시절의 독단주의로 다시 돌아갔다. 529년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플라톤 철학의 중심지였다. 여자는 입학이 금지되어 있어 어떤 여성은 남장을 하고 들어가 철학을 배웠다는 일화도 있다. 아카데메이아는 오늘날 고등교육기관 · 학술단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 출신이긴 하나,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가 플라톤의 친척에 의해 운영되자, 이 학원과의 관계가 다 소 소원해진 듯하다. '알렉산더를 지도한 후 아테네에 돌아와 리케이 온을 설립한 그는 학원 안에 있는 지붕 덮인 산책로 (페리파토스 peri: 둘레, patein: 걷다)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학파를 소요(逍遙 페리파토스) 학파라고도 한다. 그 뒤 12년 동안 리케이온을 모 든 탐구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강의했다.

이 두 학원의 차이점은 아카데메이아에서는 플라톤주의자들이 '수학'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 반면, 리케이온은 '생물학'과 '역사'에 이 바지했다는 점이다. 아카데메이아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입학불허'라는 표지판이 있을 정도로, 수학을 모르고서는 철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