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비극적 최후로 인해 '영국의 소크라테스'로 인식되는 모어가 현 실세계의 불합리한 모순을 파헤치고 인간의 절실한 염원을 담 은 진보적 사상서, 이후 유토피아 문학의 실질적인 시작과 동시에 모델 역할을 하여, 엥겔스에 의해 베이컨의 뉴 아틀랜티스, 캄파 넬라의 태양의 도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 3대 유토피아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극소수의 법률로 만사가 순조롭게 운영되고 덕이 존중되는 가운데,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영원한 사회를 만날 수 있다.
생애와 저술활동
에라스무스는 자랑스런 친구 토머스 모어가 런던탑에서 순교했을 때 “토머스 모어는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 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어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법률가·정치가·휴머니스트로『유토피아』를 저술하여 근대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런던의 재 판관의 아들로 태어나, 라틴어 학교에서 수학한 후 이어 옥스퍼 드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 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후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이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에서 법률공부를 했다. 1499년에 에라스무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 짐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유럽 휴머니즘의 우두머리였던 에라스무스는 모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성향을 강화시켜 역사연구를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모어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휴머니스트이자 신학교수인 존 콜렛이었다. 이 저명한 휴머니스트 들과의 우정 어린 교분은 모어의 재능과 인품의 계발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된 학문연구와 당시의 경 제관계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모어는 직업적인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며, 곧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 사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24세 때 하원의원이 되었으나, 헨리 7세가 의회에 청구한 왕녀의 결혼비용의 삭감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받고 정계를 물러난 다. 그 후 헨리 8세가 즉위할 때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왕의 사 절로 유럽대륙에 파견된다. 그가 대륙에 머물면서 여가를 이용해 집필한 것이 유명한 『유토피아』다. 1517년 왕의 간청에 의해 정치 생활에 복귀, 하원의장을 거쳐 1529년에는 대법관이 되었다.
1532년 헨리 8세는 형수이자 부인인 캐서린이 왕자를 낳지 못하자 그녀와 이혼하고 궁녀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모어는 앤 볼 레인을 정통왕비로 선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534년에 그 는 국왕이 영국교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골자로 하는 소위 '수장 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법률가로서 또한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다 1년 동안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모어의 400주기 기일에 즈음하여 그가 교황 정 책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성자의 명부에 올렸다.
시대적 사상적 배경
양이 사람을 먹어치운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탁월한 인물들 중 한 사람인 모어의 이념과 저서에 는 그 시대의 정치적 · 경제적 이해관계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사이에 영국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형성한 변혁의 서막' 즉 봉건질서의 해체가 일어났 다. 모어는 본원적 축적의 시작과 아울러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 그리고 이와 동시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농민들의 프롤레타 리아화와 빈곤화를 체험했다.
에라스무스가 후텐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모어는 전제정치를 극도로 혐오했으며 또 그만큼 평등을 소중히 여긴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모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관찰한 경제적 이면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양모업에 도입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적인 매뉴팩처 경제가 마치 '소름 끼치는 페스트' 와도 같이 어떻게 온 나라를 뒤덮으며 많은 들과 집, 그리고 도시들을 파괴하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는지, 그리고 양을 치기 위해 쳐놓은 울타리가 얼마나 엄청난 농민과 소작인들을 토지에서 몰아내는지, 그리고 직업과 고향을 잃어버린 대중들이 얼마나 빈곤하고 가련하며 또 어떻게 부랑자나 거지로 전락하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국왕 헨리가 통치하던 시절만 해도 72,000여 명에 이르는 크고 작은 도둑들이 처형되었는데, 이를 보고 모어는 영주와 용병들이 야말로 진짜 도둑들이라고 낙인찍었다. 모어는 인클로저 운동의 사회적인 결과를 '인간들을 잡아먹는 야생 양 떼들'로 형상화했다. 이런 점에서 모어는 마르크스로부터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탁월하게 묘사한 증인이자 비평가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완전히 제거시킴으로써만 착취와 적대적 계급이 해관계가 해소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산제적 공동삶 추구
'사적 소유관계가 존재하는 곳, 돈이 모 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곳, 이런 곳에서 정당하고 행복한 정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국가의 복지에 이 르는 유일한 길은 소유의 평등을 도입하는 길이다. 소유물을 어떤 식으로든 평등하고 정당하게 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유일한 수단은 온갖 사적 소유를 모두 철폐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모든 것은 공동의 것이다'라는 선언이 지배 엘리트를 향한 반면, 『유토피아』의 근본명제는 유토피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산주의적인 재산공동체를 그 핵심사상으로 한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더불어 시작되어 길고 복잡한 길을 거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이러한 사회질서를 옹호한 프랑스 · 영국 · 독일의 중요한 사상가들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렀으며, 이들에 의해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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