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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② 고전 해제

제 3장 <서양사상> 군주론

by Be_ni 2024. 2. 27.

군주론

분열된 조국의 통일을 위해 '여우와 사자'라는 군주의 두 가지 역할을 강조하는 정치기술의 서. 즉,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던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가 몰락하기 시작한 시대적 위기에 대응하여, 이탈리아의 구원과 갱신을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를 창건할 군주에게 요구되는 정치기술을 논하고 있다. 이 책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던 인간의 정치적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정치를 완전히 '세속적인 세계이해'에 기초하여 파악한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이론서로서 평가된다.

 

생애와 저술활동

흔히 약육강식의 '폭군 지상주의자'로 인식되어 있는 마키아 벨리, 그는 진정 권모술수의 대명사인가, 아니면 철저한 현실주의자인가?

마키아벨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 르네상스 운동의 절정기인 1469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외교관 · 정치학자 · 역사학자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밀라노 공화국 ·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 교황령 국가 · 나폴리 군주국 등의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지도자인 로렌초가 죽자 1494년 메디치 일가는 추방되고 피렌체는 공화제가 되었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이 되어 프랑스 · 독일 등 여러 나 라를 여행하며 각국의 권력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은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복귀하자 그는 곧바로 사직당했다. 그러자 그는 피렌체의 교외에서 그가 지난 날 만났던 각국의 지도자들의 정치행태와 조국이 처한 정치상 황을 관조하며, 14년 동안 『군주론』등의 저술작업에 몰두하다 58 세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 중에서 『군주론』에서는 주권자로서의 자격과 행동원칙, 리비우스 론』에서는 국가의 자유와 독립보전, 전술에서는 국가와 주권자가 국가의 보존과 권력유지를 위해 절대 필요한 군대와 병사, 피렌체의 흥성과 메디치 가 사이의 관계를 밝힌 피렌체 사, 자국어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표현한 언어에 관한 대화, 당시 사회의 모순과 비정상을 풍자한 황금 당나귀, 여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표현한 '대악마 벨화골 이야기』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문학작품 중 최대걸작은 풍자극 만드라골라』로, 보카치오에 의해 나타난 르네상스기의 사회적 타락상을 그의 예리한 문학적 재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연극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과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서 『군주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절하고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 반도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시대적 상황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싹튼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전 유럽의 화원처럼 생각하 기 쉬우나, 사실은 정반대다. 정치적으로는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생존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외부적으로 프랑스 · 독일 이 각각 통일국가 형성을 위해 발전하는 것과는 달리, 로마제국 멸망 후부터 계속된 내부적 분열이 더욱 악화되어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특히 십자군전쟁 이후 발생한 여러 도시국가들은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피렌체도 '메디치가'의 독재시대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메디치의 손자인 로렌초가 전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69년은 또한 프랑스의 샤를르 8세가 분열상태의 무력한 이탈리아를 짓밟은 해였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그의 천재성을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하는 방향으로 발휘했다. 그는 조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해결에 있다고 보고, 그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즉, 정치를 윤리 · 도덕과 분리시켜 객관적 · 과학적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통치기술로 본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피렌체의 외교사절로서 로렌초의 사망, 프랑스 침입, 로렌초를 계승한 피에로 추방, 예언자 사보나롤라의 등장과 화형, 국가 간의 무자비한 투쟁과 비윤리적인 군주를 목격하며 상 호화해를 위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 이탈리아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나『군주론』의 주인공이 된 체자레 보르지아가 부친인 교황 알렉산더와 프랑스를 업고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이에 크게 당황한 피렌체 측에서는 마키아벨리를 보르지아에게 보내 수교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지아와 만남을 통해 그의 인격,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호한 자세, 대담성, 세심함, 행동에 있어서의 잔인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군주론』에 나타난 그의 정치적 사상은 이미 이때 확립되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그는 보르지아 개인의 인간성이나 도덕적 행위를 정치적인 것과는 완전 히 별개의 것으로 처리하는 특이한 정치철학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조국통일의 등불로 기대를 걸었던 보르지아도 1503년 부친인 교황이 별세하자 정치력을 잃어, 마키아벨리의 꿈 은 수포로 돌아간다.

1512년 피렌체에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피렌체는 다시 '메디 치가'의 전제시대로 들어가고, 마키아벨리는 구정권에 재직하였 다는 이유로 1년간 억류생활을 한다. 그 후 다시 공직에 복귀되나 다시 오해를 받아 재투옥된다. 석방된 후 일체의 속세를 멀리하고 산 카시노의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작생활에 몰두한다.

 

마키아벨리즘

근대 정치사상사의 고전적 저작 중에서 『군주론』 만큼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없다. 급기야 '마키아벨리즘'이란 새로운 정치용어와 사상까지 생겨났는데, 과연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의도인지, 아니면 후세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전인수격으로 왜곡한 것인지 문제제기가 불가피하다.

본서가 1532년 출판되자, 맨 먼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종교계였다. 교황의 무능과 탐욕을 비판한 구절이 문제가 되어 교황옹호파인 예수회를 중심으로 『군주론』 소각 등 전면적인 탄압 이 시작되어, 급기야 '금서령'이 내려졌다.

이 같은 감정적인 차원의 대응과는 달리 학문적인 비판도 제기되었다. 프랑스의 법학자 이노센트 젠틸레는 『군주론』에 담긴 정 치사상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열 거하고 자기의 정치사상을 표명하였다. 그가 바로 『군주론』의 본래 의도를 왜곡해서 '마키아벨리즘'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래 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자기의 권력확대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술로 둔갑하여, 이후 루이 14세 등의 독재자들에게는 복음서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면 과연 마키아벨리가 울분을 머금고 은둔생활에서 집필한 『군주론』의 집필동기는 무엇이며,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 상은 어떤 것인가?

그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선 먼저 내부적인 단결과 외세의 격퇴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를 위해 강력한 군대와 폭군적인 전제군 주제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군주와 그가 영도하는 국가는 과연 어떤 정책으로 이탈리아를 구제할 것인가? 이러한 논 점을 그의 다년간의 경험과 학식, 그리고 천재성으로 밝혀나간 것 이 『군주론』이다.

그는 강력한 정치체제를 위해 위대한 군주와 강력한 군대, 풍부 한 재정이 필수적이며, 방법론상으로 군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어떤 수단도 허용되며 군주의 행동에는 도덕적 요소가 개입해서 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군주는 항상 국민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아무런 자원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군주는 먼저 냉철한 심사숙고형이어야 하며 조국의 이상을 구 현하기 위해서는 종교나 도덕을 초월하여 지체와 용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선정을 위해 국민의 마음을 항시 파 악하고, 이를 이용 또는 만족시킬 수 있는 총명함을 지녀야 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군주의 행동요강이 바로 『군주론』에서 그가 밝히고자 한 핵심사항이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며, 이것은 전제군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일시적 수단방법이 그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방 법(권모술수)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그가 이러한 대담한 주장을 하면서부터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은 그의 사후에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