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의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어는 플라톤의 『국가』의 영향을 받아 16세기 영국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새로운 이상향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모습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주민들은 될 수 있는 탐욕을 최소 한으로 억제하도록 훈련되며, 공동생산과 균등분배로 경제생활을 영위한다. 그의 유토피아적 사회란 온건한 청교도주의와 도덕적 발전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성격의 개혁시도는 휴머니스트의 온건함과 보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는 한계가 있다.
특히 제2권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유토피아의 공유제도, 통치자의 선거절차와 통치형태, 신앙과 도덕의 문제, 전쟁관 등이다. 선 거에 의해 선출되는 유토피아의 통치자는 그가 반역을 흠모하지 않는 한 종신제다. 그런데 선거유세 시 과대한 자기 선전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통치자는 국민의 도덕적 양심에 의한 엄격한 판단을 통해 선출되고, 선출된 다음에는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이런 점은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가 가질 수 있는 선거부정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 끝까지 반대하여 참수형을 당했다. 확실히 그는 비도덕적인 국가권력에 맞서 자신의 양심을 지킨 근대적 지식인의 표징이었다.
모어는 신앙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었고, 자신이 국왕에게 요구한 것도 자신의 신념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을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종교계에서는 『유토피아』보다 카톨릭의 휴머니스트, 순교자로서의 모어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새로운 학문'에 헌신한 르네상스 학자, 성공적인 변호 사, 16세기의 근대적 특징과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통치술'에 대한 반대자, 중세 수도원 이상향의 고수자인 모어는 자신의 이념보다 더 강력한 이념에 의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비극적 최후로 인해 그는 '영국의 소크라테스'로 비유된다.
런던 탑과 토머스 모어
런던 탑은 템스 강변에 위치한 왕실 성채로 11세기 노르만의 윌리 엄 왕이 처음으로 세웠다. 그 후 점차 증축하여 중앙의 화이트 타워를 비롯, 왕실보물관. 무기전시관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섰다.
17세기까지는 왕이 거처하는 성의 하나였으나, 후에 정치범 수용소로 이용되기도 하여, 모어, 앤 볼레인, 제인 그레이 (1553년 9일 동안 명 독상 즉위한 영국여왕) 등이 처형되기도 했고, 뇌물죄로 기소된 경험론의 창시자 베이컨이 한때 감금되기도 했다. 안뜰에는 지금도 까마귀 가 사육되고 있는데, 만일 이 까마귀가 런던 탑을 떠나면 영국은 멸망한다는 전설 때문에 여기서 사육되는 까마귀는 날개 깃털이 잘린 다고 한다.
헨리 8세와 앤 볼레인의 결혼에 반대하고, 정의와 신앙적 양심을 수호하다 런던 탑에 유폐된 모어는 사형장에서도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런던 탑 책임자인 킹스턴에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 즐겁게 삽시다"라고 위로했다. 이어 울며 매달리는 아들딸에게도 이별의 키스를 해주었다. 사형집행 통고가 내려지자 "이 음침한 현세에서 이렇게 일찍 벗어나도록 해주신 폐하께 감사드리고, 현세에나 내세에서 도 폐하를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형 집행자에게 “기운을 내게 자네의 직책수행을 주저할 필요가 없네. 내 목은 대단히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말을 남기고,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유토피아의 꿈을 찾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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