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서자 · 천민 · 여자들도 하게 살 수 '대동세계'의 꿈을 가지고, 조선중기의 문인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 우리나라의 신화 · 전설 등에 나오는 '영웅소설'의 대표작이다. 진취적이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일생을 통하여, 적서차별과 관리들의 부정 · 부패, 그로 인한 민중들의 궁핍한 생활 등 봉건사회가 야기한 사회적 갈등을 문제화하고, 그 해결방법에 있어 기존질서와 체제를 뛰어넘는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서민들이 탐독한, 보이지 않는 베스트셀러였다.
생애와 작품활동
역사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허균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최초의 국문소설가이고, 유 · 불 · 선에 통달한 학자였으며, 불꽃 같은 의지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개혁사상가였다는 평가는 오늘날의 평가이고, 당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반역과 이단의 표본이었다.
교산蛟山 허균은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 높은 명문가문 출신으로, 특히 그의 부친인, 서경덕의 제자 허엽과 두 형인 성 · 봉은 뛰어 난 수재로 동인의 우두머리였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유성룡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출신으로, 당시 서자출신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허균은 재주가 많은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 10세 전후부 터 서울에 천재로 소문이 났고, 누이도 신동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시문은 그의 반대파나 심지어 중국인들까지도 인정하였다. 그는 이미 9세에 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고 26세 때에는 장원급제를 하였다.
황해도 군수 시절 관아 별실에 불상을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다 발각돼 파직당했으며, 외교사절로 임명되어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그가 관계에 발을 들여놓고부터는, 성품이 경박하고 여자를 좋아하여 부모의 초상을 당해도 기생들과 놀아난다는 비난이 일어 벼슬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고 당당했다.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을 하기보다는 불우한 문인 들이나 서자 · 승려들과 어울려 술로 나날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은 당시 왜곡된 사회구조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 그의 제자였던 이식의 평을 들어 보자.
“세상에 전해지기를 『수호전』을 지은 사람은 삼대에 걸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는다고 했다. 도둑들이 그 책을 읽으며 높이 평가했다. 허균 · 박엽 등이 그 책을 좋아해서 그 책에 나오는 도둑들의 이름을 따서 각기 불렀다. 허균이 또 『홍길 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 그들 무리인 서양갑 · 심우영 등 이 몸소 그들 행동을 답습하여, 한 마을이 시끄러웠다. 허균이 또 한 모반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귀머거리 · 벙어리가 되는 갚음보다 더욱 심했다."
이 글을 보면 허균이 이단이었다는 것과,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어 돌려 읽으며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허균은 이런 따위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괴상망측한 사람들과 계속 어울려 다녔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그의 재주를 인정하여 공주목사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많지 않은 녹봉으로 서자들을 뒷바라지했다.
선조와 광해군에 관한 잘못된 중국 측 기록을 수정하기 위해 1614년 두 번째 중국에 가게 되는데, 많은 자금을 가지고 현민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정작 그 돈으로 책을 몽땅 사와 강릉에 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하고 선비들에게 읽혔다. 현민은 허균의 이런 일을 도왔고, 나중에 허균이 일대모반을 꾀할 적에 그도 함께 잡혀 죽었다.
그는 공주현감에서 밀려나 전북 함열에서 귀양살이하고 부안에 가서 살기도 했다. 당시 서양갑 등 서자들은 서자에 대한 차별해 소를 조정에 건의했으나, 이것이 무시되자 그들은 무력봉기를 준비하다 적발되어 일망타진된다. 그 유명한 『홍길동전』은 이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9세 때 그의 주변에는 새로운 상황변화가 오는데, 인목대비 폐비 논의가 그것이다. 당시 형조판서이던 그는 인목대비의 폐비에 찬성하고 나섰는데, 이런 내용을 담은 글을 경운궁에 투서하기도 했다. 이때 남대문에 곧 난리가 일어나니 피하라는 격문이 붙었는데, 주모자가 현응민으로 밝혀지고 허균도 이에 연루되어 잡혀왔다. 이로 인해 그는 그의 일파인 김윤황 · 하인준 · 현응민 · 우경방 등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당했다.
역적이란 이유로 그에 관한 글들은 모두 불태워졌고 악한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그가 그의 다른 작품은 모두 한문으로 썼으면서 유일하게 한글로 쓴 『홍길동전』은 민간의 숨겨진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로 계속 전승된다.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당쟁격화
여기서 우리는 『홍길동전』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균이 살았던 조선중기 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허균이 생존했던 선조 광해군 시절은 사림파 내부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상대 당과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상호비판 체제를 기본으로 정치참여층의 확대와 정치 운영의 활성화가 이루어진 반면, 국력의 낭비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정치적인 최초의 분당은 선조 때 사림파 내부에서 동인과 서인의 분열에서 비롯되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 직을 놓 고, 먼저 심의겸과 김효원이 각각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다. 당시 선조의 첫 왕비인 박 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는데, 후궁소생 중 가장 영특한 광해군이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세자의 물망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앞에 나서서 선조(당시 선조는 인빈 김 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게 건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쪽 같은 성격의 서인출신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 자로 책봉하자고 직언하여 선조의 미움을 샀다.
정철의 처벌을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맞서, 동인 내부에서 각 각 남인과 북인으로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잠시 중단되었던 붕당정치는 전란 후 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분열되었다가, 선조 사후 정인홍 중심의 대북파가 정권을 잡자,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과 조카 능창군, 이복동생인 영창군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어, 결국 광해군은 서인들에 의해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신분차별
사회적으로 양반계급들은 부국강병에 무익한 성리학적 사회질서만을 고집하여, 국가전체의 공익보다는 자기가 속한 정파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거장엔 부정이 성행하고, 관가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민심은 이미 이반되어 있었다. 거기에 조선초부터 시작된 적서의 차별은 조광조나 이이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능력 있는 서자들의 관계진출을 막아, 국가적 차원의 능률의 극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회개혁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시 명문의 서자요 재사才士로 알려진 서양갑 · 박응서 · 이경준 · 심우영 · 박치인 · 박치의 · 김경손 등 7인은 임금께 서자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줄 것을 연명으로 상소하다 묵살되자, 이들은 여주강 가에 굴을 파고 무력봉기를 준비했으며, 이중 박응서가 거사자금을 마련키 위해 문경새재에서 은상인을 털던 중 잡혀, 모반계획이 탄로나 모두 체포되어 죽은 사건이 일어난다.
홍길동은 조선초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적의 두목이었다. 실존인물인 홍길동이 서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소설에서는 그를 서자로 만들어, 부정한 재물을 털고 끝내 성공을 거둔 후, 임금에게서 서자의 굴레를 벗고, 이어 온갖 차별이 없는 율도국을 건설한다. 홍길동은 바로 서양갑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홍길동전』은 이상과 같은 혼탁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일종의 사회소설이다.
다음 글 읽기
'동서고전 > ② 고전 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장 <동양문학> 홍길동전(3) (1) | 2024.01.24 |
---|---|
제 2장 <동양문학> 홍길동전(2) (0) | 2024.01.24 |
제 1장 <서양문학> 어머니(3) (1) | 2024.01.23 |
제 1장 <서양문학> 어머니(2) (0) | 2024.01.22 |
제 1장 <서양문학> 어머니 (0) | 2024.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