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한 시대의 보편적인 이념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려 했던 고리키를 만날 수 있는 작품. 노동자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여정 끝에 세계적인 문호로 대성한 고리키가 1907년에 발표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효시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매사에 소극적인 한 어머니가 혁명운동에 뛰어든 아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들의 혁명적 대의를 이해하면서 따뜻한 인간으로 변모해, 마침내 여성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책이란 꼭 필요한 것이다. 과거에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해왔다면, 지금의 노동자들은 『어머니』를 매우 유용하게 읽고 있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이 때, 진정 시의적절한 소설이다.” - 레닌
카이저 수염과 사람을 노려보는 무서운 눈빛이 인상적인 막심 고리키는 볼가 강 연안에서 하층계급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4 세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 12세에 구두 수선공을 시작으로 접시닦이 · 심부름꾼 · 수위 · 부두노동자로 일 하면서 학생 · 지식인 · 혁명가 등과 접촉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인민 민주주의 (일종의 사회주의)와 톨스토이를 맛보았고 톨스토이적 사회공동체를 꿈꾸었다. 훗날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의 면모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경 찰의 밀정노릇을 하라는 유혹을 받기도 하고, 연애를 시도해보지 만 여지없이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염세증에 걸려 자살을 기도하는 등 보통 젊은이처럼 청춘을 앓았다.
1892년 처음으로 '막심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마카르 추드라』 를 발표하였고, 이어 『첼카쉬』를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했다. '고리키'라는 말은 '고통받는 자'라는 뜻으로 고난 속의 러시아 민중의 고통을 짊어지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1899년에 는 그때까지 써모은 단편 등을 기록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출 판, 일약 유명작가가 되었다. 1901년에 발표하여 선풍을 일으킨 산문시 『바다제비의 노래』는 혁명의 횃불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희곡 『소시민』을 발표해 극작가로서도 높은 평판을 얻었다. 체호프의 격려 편지를 받은 것도 이때쯤이고, 멀리서만 바라보던 톨스 토이도 만날 수 있었다. 구두닦이 인생에서 유명작가로 엄청난 신분상승을 했던 것이다.
그 뒤 혁명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나, 톨스토이의 항의로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 요양지를 찾아 전전하였다. 1902년 과학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혁명운동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황제에 의해 취소되었다. 이 해에 하층계급의 고통을 그린 『밑바닥을 발표,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05년 처음으로 레닌을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피의 일요일'에 가폰 신부가 이끄는 시위대에 적극 참가하여 체포되었으나, 국내외의 격렬한 항의로 곧 석방되었다. 1906년에는 당의 자 금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귀국거부를 당해, 할 수 없이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정착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델이라 불 리는『어머니』(1907)를 발표하였다.
한때 사상적 동요를 느껴『참회록』을 쓰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레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13년 대사면으로 귀국, 10월혁명에서는 볼셰비키를 지원했으나, 그 과격한 혁명방법에 대하여 <신생활>지를 통해 강하게 항의하여 레닌과 한때 결별하였다.
50세에 10월혁명이 일어나고 레닌의 혁명정부가 수립되었으며, 56세 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자 과격파에 의해 고리키 숙청이 대두되었으나, 개인적 우정을 가진 레닌이 그를 국외로 피난시킨다. 그는 유럽 지역을 여행한 후 이탈리아 소렌토에 정착했다.
그 후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하고, 그 후계자로 스탈린이 등장하자 서방세계와 스탈린은 고리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고리키의 존재가 필요했는데, 결국 스탈린의 강력한 귀국요청에 굴복하여 귀국했다. 이때 스탈린은 니즈니노브고로드 시를 고리키 시로 개칭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베풀었다.
그는 스탈린의 배려로 작가의 최고위치인 작가동맹위원장이 돼었으나,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르기도 해서 해외여행 여권이 거부되기도 했다. 1936년 그는 침실에서 죽었는데, 누군가에 의한 독살로 추정되나, 장례식 때 가장 슬퍼한 자가 스탈린이었고, 영구차를 몸소 떠메기도 했다 하니, 누가 독살한 것인지 영원한 수수 께끼가 아닐 수 없다.
밑바닥 노동자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생의 여정 끝에 세계적인 문필가로까지 대성하여, 러시아 혁명기에는 레닌 및 스탈린과의 정치적 견해차이로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을 도와 소련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했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인 그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고리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중심이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완성한 작가로서 문학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고리키는 종래의 혁명적 소설가란 범주에서 벗어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의 황금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물려받아, 다른 문학세계로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다음, 후배들에게 넘겨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의 혁명적인 상황의 이해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9세기말은 봉건적인 차르체제의 몰락과 함께 뒤늦게 들어온 자본주의의 위세가 점차로 강화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사회의 부패는 심화되고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가 대두하였고, 1905년 혁명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이러한 격동의 상황 속에서, 그의 문학은 강인한 주인공에 의한 사회의 부정 · 부조리에 대한 공격, 인간 옹호를 목표로 하는 휴머니즘이 강한 문학이다. 그는 출신성분이 말해주듯 주로 하층민의 밑바닥을 리얼하게 그려나갔는데, 희곡 『적』과 장편소설 『어머니』 는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을 그린 전형적인 작품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잘 나타낸다.
그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혁명초기의 당성이 강하고 기계주의적인 문학 창작방법에 대한 비판에서 출 발한 것으로 소련문학의 새로운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으나,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 동지냐, 적이냐의 단순한 인물설정 등 초기 우리나라의 카프 문학의 양상과 비슷한 이전의 문학경 향은 자유로운 문학의 창조를 저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선을 수정하면서 등장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먼저 현실에 충실한 역사적 구체적 묘사를 할 것, 그리고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과정 속에서 표현할 것, 마지막으로 현실의 충실과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는 예술적 표현과, 사회주의 정신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의 혁신과 근로자의 사상적 개조라는 과제를 일치시킬 것 등이다. 이는 주로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이전의 교조주의를 비판하거나 예술성을 주장하면 '형식주의' 반동문학으로 낙인을 찍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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