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탄잘리
어느 가을날,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싶은 한 권의 시 집으로, 동양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인도의 시성으로 일컬어지는 타고르가 1909년에 벵골 어로 출판 한 『기탄잘리 (한 묶음의 노래)』는 제목 없이 번호만 붙인 103편의 종교적인 서정시 모음이다. 시인 자신이 영역하고, 예이츠가 서문을 썼다. 출간과 동시에 선풍을 일으켜 1913년에 노벨상을 받게 되었 고, 김억의 번역본(1923)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영혼의 영원한 자유는 사랑 속에, 위대함은 작은 것 속에, 무한은 형태의 구속 속에 있음을 노래한다.
생애와 작품활동
인도의 시인 · 사상가 · 교육가 · 음악가 · 화가 · 사회운동가 등 실로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20세기의 기적적 인물이다. 인도 벵골의 천 년을 헤아리는 오랜 바라문 계급의 명문 타고르 가의 14번째 아들로 캘커타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그의 가계에선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그의 부친 데벤드 라나트는 평생을 종교개혁에 바쳐, 근대 인도의 정신적 부흥에 커 다란 영향을 주었다.
부친을 따라서 히말라야 산맥 또는 아름다운 명승지를 다니면 서 자연에의 신비를 엿볼 수 있었던 그는 이러한 정신적·예술 적 ·학문적 분위기, 아름다운 인도의 자연 속에서 성장했다. 11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5세 때 형들과 함께 잡지를 편집, 17세 때 런던에 유학, 법률을 전공했으나, 1년도 못 채우고 귀국했다.
19세 때 첫 시집을 완성하였고, 1901년 부친이 명상의 장소로서 구도자에게 개방했던 볼푸르 숲 속의 샨티니케탄(평화의 집)을 물려받아,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학원을 설립, 오랜 전통에 기초하여 개성을 일깨우는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타 고르의 '동서문화의 새로운 종합'을 이념으로 하는 비슈바바라티 대학으로 발전, 인도 지성의 요람으로 수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국립 종합대학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통한 전인교육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설립한 이 산티니케탄의 생활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하고 유회하면서 '이 학원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이라고 그들의 인간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타고르로 하여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한 시집 『기탄잘리』 와 『생명의 실철』이란 유명한 철학서도 바로 이 샨티니케탄에서 이 루어 졌다. 1913년 『기탄잘리』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예술적 재능은 연극 · 음악에까지 발휘되어 인도의 국가도 그의 작품이며, 그 자신이 출연, 작곡하여 인도에 이른바 샨티니케 풍의 가 무연극을 발달시켰다.
제1차대전시에는 매우 상심하였고,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세계는 열광적으로 이 시성을 추앙하여, 그의 시와 사상 속에서 새로 운 복음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열광 적인 환대를 받았다. 소련도 방문했지만 결코 유물론에 흔들리지 않았다.
제2차대전이 일어나자 간디와 손잡고 직접 반영운동을 하다가, 간디의 양해하에 그는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도 근대사의 위대한 영혼으로 서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간디의 교육정신은 타고르에게서 오고, 타고르의 평화이념은 간디의 철학과 공통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정치적 현 실운동의 지도자요, 한 사람은 문화적 정신운동의 영원한 영도자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타고르는 1941년 80세를 이승의 고비로, 숭고한 이상이 무모한 전쟁과 유혈 속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을 감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기탄잘리』의 어린이판이라 할 수 있는 초승달』, 지상에 바치는 전원적인 사랑의 시라 할 수 있는 『정원사 신에게 올리는 사랑의 기원을 담은 『열매 모으기』, 희곡집인 『우체국』 등이 있다.
시대적 상황과 그의 작품세계
타고르가 생존했던 인도는 정치적으로 영국의 식민지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창조력을 잃고 민족적 자유의 상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는 소수의 비타협자들을 제외하고는 서양의 모방자와, 과거의 전통과 교리에서만 위안을 찾고자 하는 보수파들이 득세하는 상태였다. 종교적으로는 힌두교가 오랜 인습에 얽매여 낡은 봉건의 탈을 못 벗고 있었고, 한편에 서는 바라문 교가 새롭게 등장하여, 오래된 인습을 깨뜨리고 새 시대를 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여전히 존속하여, 국민들 사이의 동질감과 일체감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 4성의 구별은 불교의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심 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암흑의 세계에 드디어 한 줄기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타고르의 탄생이 그것이다. 자신의 말을 빌면 자기의 삶 속에 세 가지 흐름이 합류하였다고 한다.
첫째는 숭고한 지성인인 로이 (Roy)에 의해 도입된 종교적인 흐름이다. 이는 매우 개혁적인 것으로, 과거의 인습과 구태의연한 형식에서 벗어나면서, 한편으로 과거의 가시덤불 속에서 이상의 싹을 찾으려는 르네상스적인 시도였다.
둘째는 벵골 문학의 개척운동이다. 그는 당시 문학이 창조력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문학을 오랜 잠에서 깨워야 하며 문학이 새로 운 힘과 운치로 넘칠 때, 그것은 아름다움의 비전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셋째는 국민운동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의 사상과 전신의 힘으로 세계를 세우 려는 광범위한 민족운동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그가 고민하고 열렬히 추구하고 염 원한 것은 오직 인도의 자유와 민족의 해방, 동양의 발전, 나아가 서 동서양의 융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낸 그의 작품생활은 대개 4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
15세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벵골의 셸리 (Shelley) 라고 일컬어지 시대다. 최초의 시집은 "바누 신하로 익명으로 출간했으나 고전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고, 저녁의 노래』 『아침의 노래를 거쳐 초기 서정시의 절정을 이루는 『장조와 단조』를 낸다.
제2기
부친에게서 영지인 셀리다 관리의 위임을 받아, 자연 과 가난한 농민생활과 접촉하며, 사회악과 인습에 도 전하는 한편, 갠지스 강 유역의 대자연의 품에 안겨 명상을 일삼았다. 이 시기를 '사다나' 시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내던 잡지인 「사다나」에서 유래했다. 시기에 희곡 「제물」 「치트라」 등이 나 오는데 초기의 서정세계에서 벗어나, 인생의 현실과 사회고발, 신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제3기
1901년부터 벵골 평론을 내면서부터 시작된다. 1905 년에 영국의 벵골 분리정책에 항의하여, 펜을 휘둘러 국민의 자각을 촉구한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고라』와 힌두교의 가정생활을 비판한『운명의 난파』, 시집 『교차로』등이 있다. 그러 나 그의 본령은 시인인지라, 간디와 함께 하던 정치활동을 중단하 고 샨티니케탄으로 가서 숲 속에서 고독한 명상을 하며 삶의 심층을 더듬는다.
편협한 국수주의를 지양하여 영혼을 보편의 세계로 유도하고, 삶의 다양 속에서 영원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경건한 종교시인으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향한다. 사랑과 평화의 국제주의적 이상에 입각한 교육가로서의 사업에 헌신한다.
제4기
1908 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두 아들 역시 계속해 서 잃는다. 실의와 무상과 고독 속에서, 그는 『기탄잘리』 『암실의 왕』 『우체국 등으로 대표되는 '샨티니케탄 시대'가 열린다. 1912년 2차 영국방문을 계기로 그는 '동방의 시성'으로 세 계에 알려지고, 다음 해에 노벨상, 또 다음 해에 영국왕실에서 작위를 받는다. 그러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반납했다. 그 후 샨티니케탄에 세운 작은 학교를 사랑과 평화의 국제적인 문화의 중심이 되는 대학으로 키우는 데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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