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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② 고전 해제

제 2장 <동양문학> 노잔유기

by Be_ni 2024. 2. 12.

노잔유기

20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노잔’이라는 떠돌이 의사가 청대 말에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의 악정을 폭로 · 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렴을 표방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의 학정이 탐관오리들에 못지않은 사회혼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청말, 풍전등화격인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작가의 통곡이라 할 수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유악은 강소성 의미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맹웅이고, 자는 철운이다. 선조는 무관이었으나, 부친은 독서인으로 진 사에 급제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부친 은 차남인 유악이 독서인으로 성장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소년시절에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지 않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소년시절의 친구인 나진옥은 『유철운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이 되면서 그는 대오각성하여 책에 파묻혔다. 20세 되 던 해에 남경에서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광서제 6년(1880) 에는 태주학파(양명학의 좌파인 왕간 중심학파)에 심취하여, 양주에 가서 당시 양주학파의 거장인 이용천에게 사사하니, 그의 사상적 체계는 이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1885년에는 다시 과거에 응 시코자 남경으로 가던 중 생각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한다.

광서제 14년(1888) 에 하남성 정현에 큰 수재가 났을 때, 당시 하남순무이던 오대징을 도와 치수에 큰 공을 세웠고, 이듬해에 산동일대의 대수재시에는 산동순무이던 장요의 초빙으로 치수에 참가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치수의 경험을 토대로 『치하칠략治河七』『황하변천도』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중국에서 산업진흥의 첩경은 철도의 부설과 부존자 원의 개발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한漢철도와 진진津철도의 부설 및 산서탄광의 개발을 정부요로에 건의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서양인의 자본을 들여오려 했다. 가 '서양인의 앞잡이' '매국노'라 하여 지탄을 받았다.

광서제 27년(1901), 청을 도와 서양타도를 외친 반기독 교집단의 봉기인 의화단 사건 때, 난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연합 군이 북경에 진주하자, 그는 러시아 군이 태창을 경비하다가 태창이 방해가 되어 소각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들을 찾아 가 교섭 끝에 양곡을 싸게 구입하여서 난민들에게 배급, 구휼에 힘썼다. 다시 상해에 나가서는 양무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태창의 정부양곡을 사사로이 매입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그는 대단히 진보적인 인물이었으나, 혁명을 원치는 않았다. 따라서 남방에서 봉기하여 멸청흥한滅淸興漢의 기치를 들고 의화단을 옹호하던 서태후 일파인 보수파도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 보수적 유신파로 자처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즉, 어둡고 부패한 관리 들은 견책했으나, 봉건독재를 수호했으며 농민들의 반제투쟁은 반 대했다. 평생 그는 꽤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가 펴낸 『철운장 구』는 최초의 갑골문 서적으로 갑골문 연구에도 공헌 바 크다.

 

시대적 배경과 견책소설

시대적 배경

무술개혁(1898)으로부터 신해혁명(1911) 사이, 대략 1900~1910년 사이에 중국소설사에는 새로운 발전적인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개량주의적인 정치요구를 반영하고, 사회의 암흑면 관계의 부패상 제국주의 침략 자들의 만행을 견책하는 '견책소설'이 대량으로 창작되었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중일전쟁 후 제국주의의 침략은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었으나,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부패한 청조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나라가 약해진 원인을 찾고, 나라를 부케 할 방도를 찾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는 강유위 · 양계초 · 담사동 등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봉건사대부들은, 개량주의적 정치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소설계의 혁명은 바로 이 러한 전체 개혁운동의 한 부분으로, 시대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유악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광치제 29년(1903) 의화단사 건이 끝난 2년 후가 되며, 일본과 영국이 중국과 한국을 침탈하려고 영 ·일동맹(1902)을 체결한 다음 해가 된다. 청의 운명이 열강제 국에 의해 풍전등화격이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 스스로가 서문에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개인 · 국가 · 민족 · 종교 등에 대하여 여러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울음도 더욱 통렬하다"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통곡이라 할 수 있다.

 

견책소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소설을 분류함에 있어 견책소설 (censure novel) 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고 는 "종전에는 이런 종류를 풍자소설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나, 청말의 일부 소설은 풍자라고 하기에는 숨겨진 것을 파헤쳐 폐악을 폭로하고 시정을 규탄함에 있어, 그 언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풍자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중에서 이보가의 「관장현형기』,오옥요의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 증박의 『얼해와』『노잔유기』와 함께 청말의 4대 견책소설이라 했다.

청말의 소설은 대부분 정치에 대한 견책, 정계 내부의 폭로라는 경향을 지녔는데, 이는 1902년 양계초가 제창한 '소설계 혁명'이 론에 동조한 것으로,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소설들은 현실의 부패를 폭로하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데, 예술성은 다소 미흡하며 저널리스트의 폭로기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 직접적인 계보는 오경재의 『유림외사』에서 찾을 수 있으나, 풍자성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