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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① 동 ·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 2장 중국사상의 흐름과 고전(5)

by Be_ni 2023. 12. 31.

아편전쟁 이후: 전통사상의 변용

중국의 근대화운동

1840~42년의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구 미자본주의 경제의 중국진출에 따라 중국의 서양 근대문화와의 접촉이 증대하였고, 이로 인해 전통사상이 충격을 받아 중국인의 사상 또한 근대화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 쟁에서 영국군에게 패한 뒤 태평천국운동과 그 밖의 반란이 종종 일어났고 또 애로호 사건으로(1856)으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중국은 연이어 어려운 국면을 맞았다. 이 위기 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통감한 유력한 관료들이 서양식 공장을 설립하여 병기나 함선제 조에 힘을 쏟았다. 이를 양무운동이라 하며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서 '중체서용론 제시되었다. 인류도 '이 덕 등 근본적인 정신적 기반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를 지주로 삼고,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면에서는 서양의 앞선 부분을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사고방식이다. '정치면에서는 공양학자 강유위 등에 의한 '변법운동變法運動’ 이 도모되었다. 청의 광서제는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조정의 정 치대변혁을 꾀하였으므로, 이 의견을 받아들여 1898년 여러 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신정은 약 백일 만에 서태후西太后 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변법은 실패로 끝났다. 강유위는『대동서』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 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 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다. 양무운동이나 중체서용론은 기술부문에서만 서양문화를 이용하 려는 발상인 반면, 변법 운동은 정치나 경제제도까지도 서양의 근 대적인 요소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서양에 관한 지 식도 충분치는 않았지만, 19세기 말부터 엄復이 T. H. 헉슬리 의 『진화와 윤리 (1893)를 번역한 『천연론(1898)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가 나와 서양사상 문화의 대량적인 소개와 수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래의 근대적인 여러 사상과의 본격적인 대결 또는 그 수용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점에 대하 여 중국인의 대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손문의 삼민주의

서구화 반대론이나 전통문화 수호의 주장도 끝까지 끈질기게 나왔고 여러 논점을 둘러싸 고 많은 토론이 되풀이되곤 했지만, 결국 대세는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의 사상 자체가 근대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갔다. 이 에 따라 청나라 조정을 타개하기 위한 혁명사상도 활발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손문의 '삼민주의'로, 이것은 유교적인 바탕 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멸만흥한漢을 기치로 내건 반창조적인 면과 외 국의 압박에 반발하는 배외적 면을 겸한 것이었다. 현재 인 중국과 대만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은 삼민주의』를 남겨 현재까지도 중국국민당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손문 등 의 혁명운동은 1911 년 신해혁명을 성공시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다만 그 뒤에도 북양군벌인 원세개凱 등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여 혁명의 성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모택동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데 있어 서 일본이 중국에 제시한 21개 조의 요구에 대한 중국 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의 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항의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는데, 이 는 정치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큰 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을 5·4운동이라 한다. 그 주류를 이룬 사상은 중국의 현 상황을 대외적으로 반식민지, 대내적으로 반봉건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 한 단계로 보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입장에서 전통사상을 비판하고 철저한 근대화를 기한 것인데, 특히 민주주의와 서양학 문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또 다분히 사회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1921년 진독수陳獨秀 등이 중국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손문이 주 재하는 국민당은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했다.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이 북방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 벌에 성공하고 남경(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 주석에 취임했는데 장개석은 복고적인 정책을 취하여 공산당과 대립함으로써 국공은 분열되었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이후 중 · 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는 항일전쟁 시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 사이 공산당은 모택동이 주석이 되고 제2차 국공합작도 이루어져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으나, 1945년 일본의 항복을 사이에 두 고 국공의 내전이 재연되어, 1949년 결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 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신민주주의 노선에 입각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시작되었다. 한편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혁명의 경험을 총결하여 「실천론』을 저술했다.

 

문화대혁명의 종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모택동이 추 진했던 각종 개혁과 '대약진운동', 그리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건 설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던 ‘문화대혁명’ 은, 모택동의 사망 (1976)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1978년 등소평은 주도 권을 잡으면서, 4대노선(농업 · 공업 · 과학기술 · 군사)의 현대화 추구에 주력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모택동의 개혁이 지나치게 파괴 적이고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가 송두리째 유린당하면서도 결국 남은 것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갈등뿐이라는 현실을 중국인들 이 깨닫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사상의 현대적 의미

개인의 내면적 · 도덕적인 자각을 중 시하는 중국사상은 오늘날 현대 산업 사회에서 중요한 원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 전과 더불어 인간소외 · 배금주의 · 환경오염 등의 병폐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오늘날, 우주와 인간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인간과 자연 간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중국사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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