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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① 동 · 서양사상의 흐름과 고전

제 2장 중국사상의 흐름과 고전(4)

by Be_ni 2023. 12. 31.

북송중기-아편전쟁: 성리학의 전개

성리학

성리학은 원시유교나 한 당 시대의 훈고학과는 다른 유학으로 송학宋學 ·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이론의 학문, 즉 철학이지만 경학의 면도 갖추고 있어, 경전을 깊이 고찰·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불교의 이론이나 노장 · 도교의 설까지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종래의 유가사상에 결여되었던 고도의 철학이론을 수립, 그 이론에 의하여 경전을 새로이 해석했 다. 그들이 구축한 이 독자적 철학이론 체계에서 신유학의 큰 특 색이 있는데, 그 학문의 본질은 이론체계 수립 자체에 있었던 것 이 아니라, 이론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인격 수양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성리학을 대성시킨 것은 남송의 주희, 북송의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 소옹(소강절) 등의 철학을 계승하였고, 특히 정이의 학설을 많이 수용 · 종합하여 주 자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완성했다. 주희의 철학이론은 『근사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와 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는 사물본연의 상태를 규정하는 존재원리이고 '기'는 물질의 근 원이다. '이'는 또 "사람은 이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이상적인 인 간성의 전형이며, "사람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주희의 본체론은 모든 사물은 ‘이’와 ‘기’에 의하여 성립하 고 존재한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이지만 '기’ 보다 ‘이’를 근원적 존재로서 파악했다. 사람의 성性에 있어서도 '성즉리性理'라는 명제를 내세워 '이'에 의하여 '성'을 설하며, 사람의 '성'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다 는 성선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사물의 ‘이'를 인식하 여 마음을 '이'에 합치시킨 상태로 유지시켜 '이'에 따라 행동해 야 하며, 그것이 학문(수양)이라고 하였다. 또 화이의 구별과 오륜의 명분을 분명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주자학을 신봉하 거나 계승하는 학자가 수없이 나왔다. 또 원나라 때에는 과거시험에서 경전의 해석으로 주자학계 주석이 채용되었으며, 명의 영락永樂시대(15세기 초) 이후는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위 치가 더욱 강화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르렀다.

 

양명학의 등장

한편 주자학과 경향이 다른 사상으로서는 심학의 경향이 있었다. 같은 유가사상 내부에서 주희와 같은 시대의 육구연은 주희가 설하는 사물의 '이'를 아는 것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마음의 수련에 진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량·섭적 등의 사공학파事功學派는 공리주의적 입장에 서, 주자학을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여 주희와 각각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심학의 요소가 성장하여, 진헌장 무렵부터 주 자학을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왕수인王守仁(왕양명)에 이르러 양명 학으로 대성되었다. 왕양명의 저서 『전습록』에 잘 나타나 있는 양 명학은 '심즉리心' '지행합일行 '치양지설을 핵 심으로 했고, 그중에서도 자기 마음의 양지(시비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선천적인 지력)를 신뢰하고, 양지의 판단대로 행위하라 고 하는 '치양지'의 가르침을 궁극으로 하는 심중시·실천 중시의 철학이었다. 한편 왕수인과 같은 연대의 나흠순 · 왕정상 등은 주자학에서 설 하는 이른바 '기' 보다도 근원적 존재원리인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기'는 '기'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변화 · 운동하여 사물을 형성한다고 하면서 '이'보다도 '기'를 근원적 존재로 보는 '기일원론'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기의 철학'은 그 뒤에도 발전하여 청나 라 중기의 대진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 대진에 의하면 '기'즉, 육체에 부수되는 정情이나 욕(주자학에서는 정이나 욕은 악의 근원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을 고유의 것이라고 적극 긍정한 뒤 성선설을 제창했다. 주희의 '이의 철학'은 '이'라고 하는 사회규범을 중시하는 철학 이기 때문에 관학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의 철학'은 현실생활을 중요시하는 철학이고, 왕수인의 심학은 마음의 권위, 자기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철학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본래 비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주자학에서 설하는 규범과 별개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도덕을 확립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점에서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또 주자학을 무너뜨리고 그에 대신할 수도 없었 다. 왕수인 출현 후의 주자학계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우세한 시기가 있었고, 왕수인이 죽은 후에 2, 3개파로 나뉘어 17세기 초까지도 양명학이 성했지만 그 후 쇠퇴하였고, 아울러 수양학문으로서 성리학의 발전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경세학, 고증학, 공양학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17세기 중반)의 혼란기에는 이에 대신하여 경세치 용經世致用의 실학實學이 제창되었고, 정치론이나 사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중국지배가 확립되고 나 라가 안정되자, 실학의 요소가 약해져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고문서를 실증하려는 청조고증학이 학계를 휩쓸었다. 그 고전연구의 성과에 의하여 종래의 고전해석에 수정을 요하는 곳이 많이 생겨났지만, 명교로서의 주자학의 권위에 흔들 림이 없었다. 또한 19세기에는 정치색이 짙은 공양학이 성 행하였다.

 

불교의 명맥유지

수 · 당 시대에 융성했던 중국의 불교는 845년 제2기 말기에 당나라 무종의 폐불과 955년 오대 후주의 세종의 폐불 등 두 차례의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 뒤 선종과 정토교가 살아남아서 제3기에는 이 둘 을 중심으로 제종겸수의 형태를 취한 융합적이고 민중적인 불교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 표방하여 불전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통하여 자력으로 불교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오로지 염불로써 극락정토 왕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정토교는 가장 민중적인 가르침이어서 폭넓은 귀의를 얻게 되었다.

 

도교의 민간종교화

도교는 가장 융성하였던 당나라 때를 이어 송나라 때에도 민간종교로 계속 번성하였다. 남송 때 금나라가 지배하는 화북에서 새로운 도교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 왕철이 시작한 전진교는 주술성을 배제하고 타좌수양하여 도를 깨닫는 것을 지향했으며, 윤리적인 실천을 중요시하고 교단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유 · 불 · 도 3교 사이에서 유교는 불교 · 도교를 이단시하고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주자학이나 양명학도 원래 이들의 학설을 수용한 면도 있었고, 특히 양명학 계통에서는 3교의 조화합일을 설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불교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종파의 융합, 겸수, 특히 선종과 정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 말에는 다시 3교합일론이 제기되었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교합일의 풍조를 배경으로 선서 인과응보 권선징악 사상을 기초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하는 책)를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서양학술의 전래

당나라 초(7세기)에 경교(크리스트교의 네스토리우스파)가 전래된 일이 있었지만,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명나라 말(16세기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카톨릭을 중국에 전해왔다. 1583년에 이탈리아의 마테오 리치는 중국 본토에 들어와 1601 년 베이징(북경)에서 공식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밖에도 상당수의 선교사가 차례로 도래하여 지식 층과 민중에 대한 포교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자체보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유럽의 과학기술(주로 수학 · 천문학 · 측량 · 수리 · 병기 등에 관한 기술)이 환영을 받았고, 특히 천문역학 면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그 뛰어남을 인 정하여 공식 채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학문은 명 · 청 시대를 통하여 이 방면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자극하여 학문진보에 기여한 바가 컸다. 왕수인의 심학이나 나흠순의 '기의 철학’이 나온 16세기 이후(혹은 양명학이 쇠퇴한 명말 청초 17세기 이후)를 제3기에서 제4기로의 과도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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