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외사
오경재(1701~1754)의 55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그 내용은 명대사회로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청대사회를 풍자하였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폐단과 관리사회의 부패상을 폭로 · 비판하고, 또 청렴하고 유능한 이상적인 관리상을 제시하였다. 예술기 교상 풍자적 수법이 뛰어나서 풍자문학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청의 소설가로 홍루몽의 조성근과 동시대 인물이다. 안휘의 '전초 사람으로, 그의 조상들은 벼슬한 사람이 많아 백여 년 을 두고 전초의 망족이었으나, 그의 부친 때부터 가세가 기울 기 시작하였다. 그의 부친 오림기는 청렴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아 관직은 미미하였으나, 가산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 오경재는 부친의 인품과 학문자세를 경모하였고, 이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정신 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오경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암송에 뛰어났으며, ‘문선文選'에 정통했고 시詩나 부賦는 붓을 드는 즉시 완성했다. 13세에 모친을 잃고 23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의 생활에는 변화가 생 겼다.
남을 돕기를 즐기며 금전과 재물에는 욕심이 없는 성격이어서, 10년도 되지 않아 가산을 탕진하고 곤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빈 궁해서 친지들의 비난을 받자, 강녕에 옮겨 살면서 동지들을 모아 우화산 기슭에 선현의 사당을 지었는데, 자금이 부족하자 고향의 옛집을 팔았다.
이로 인해 생활이 더욱 곤궁해져서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글을 써서 팔거나 벗들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고’ ‘옷가지는 모조리 저당잡히고’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형편에서, 엄동설한이면 대여섯 명의 벗들과 함께 달밤을 타서 성밖 수십 리를 돌며 발을 덥혔다. 건륭 19년(1754) 궁색하고 영락한 가운데 양주에서 54세로 죽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곤궁한 유학자로 전락한 오경재는 세태의 변천과 인심의 간교함을 깨달았고, 이는 『유림외사』를 창작하는 데 기초를 제공했다. 가정의 몰락과 그 자신이 겪은 고난은 그 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추악상과 노동계층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암흑 같은 정치에 대하여 갈수록 불만을 품게 되었고, '팔 고문'으로 시험 치는 과거제도에 관하여 불만이 싹텄다. 팔고 문이란 과거시험에서 4서 5경의 유교 경전에 대한 답안작성 형식으로, 까다롭고 엄격하여 수험생의 창의력이 제약받았음은 물론, 나아가 명대의 사상과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여, 명대의 사회와 문 화에 큰 해악을 주었다.
1749년 건륭제가 남부지역을 순시하는데, 다른 문인들은 길옆에 물러서 엎드려 영접했으나, 오경재는 이를 거부하는 오만한 태 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계급의 제약성과 유교의 봉건윤리도덕을 믿었으며, 만년에는 경학을 연구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유림외사』외에 『문목산방집』 12권이 있는데, 그중 4권이 전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과 저술동기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 3대 승평承平시대란, 한漢의 문경지치 와 당의 정관·개원지치開元之致그리고 청의 강희康 熙 · 옹정雍正 · 건륭지치乾隆之를 말하는데, 이 3대 승평시대는 각기 시대적인 성격이 다르다. 한의 문경지치는 중국의 봉건제도가 발전하여 생상력이 크게 향상된 시대였다. 당의 정관 · 개원지치는 경제가 진일보한 시대로 경제와 문화 양면에 걸쳐 균형 있는 발전과 번영을 이룩한 시대였다.
그러나 청의 강희 · 옹건지치는 건국 후 반세기에 걸쳐서 국가 기틀을 공고히 한 후, 한편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한편으로 질서와 생산력을 회복한 시대였다. 청나라는 여진족(만주족)이 중국의 한 족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로, 중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오랑캐로 간주해 오던 자들로부터 정복을 당했다는 사실에 천자의 나라를 자처하던 그들의 자존심은 큰 타격을 입었다.
청은 초기에 반청 무장세력을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지속적인 문화통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순치제의 변호복 강조와 강희제와 옹정제에 의한 문자의 옥獄을 중국의 한인 사대부들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재난으로 받아들였다. 즉, 청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연구에만 몰두한 정치개혁 사상가인 황종희는 명·청의 왕조교체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天 崩地解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이를 단순한 왕조교체 차원을 넘어 천하가 무너지는 비극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문화적 암흑기 가 도래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황종희와 함께 청대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는 명말 청초의 대재난을 역사적 비극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한 차원 높은 방향으로 승화시켜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국가의 멸망보다는 천하의 멸망이 더 중요한 것으로 보고, 국가의 멸망은 군주의 책임이나, 천하의 보존에는 민중도 그 책임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도 반청 지식인 중 3유로인 황종희 · 고염무왕부지는 명의 멸망에 대해 명대 지식인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을 갖고 경세사상經世思想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결과 청대의 새로운 학풍 인 '고증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고염무의 인식처럼 '만주족의 한족지배를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 위에 강희 · 옹정 · 건륭제가 취한 한인학자에 대한 문화적 회유정책도 한인 지식인으로 하여금 적 극적으로 현실참여에 나서게 하였기 때문이다.
오경재가 태어난 1701년은 청조가 50년 동안 계속된 한족의 저항을 진압하고, 국가의 기초를 굳건히 한 직후였다. 한족의 항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오직 팔고문을 부지런히 하여 관에 나갈 생각만 하는 어두운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유림외사』 를 통해 과거제도에 대한 불만과, 허위와 가식에 찬 관료사회의 부패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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