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02. 인간의 합리적 · 사회적 본성(2-2. 근세 이성주의)
그러나 이와 같은 고전 고대의 이성주의적 인간관은 서양의 경우 16세기 르 네상스를 거쳐 당시의 인문주의 · 종교 개혁 · 자연과학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나아가서 계몽주의 사조와 근세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 전통에 뿌리가 되었다.
물론 이성적 존재로서 근세의 인간 개념은 고대 그리스적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 사상에 따르 면 인간 이성은 인간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로서 세계 이성과 동질적인 것 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 인간의 주체 적 자아 개념이 등장하고 자연과 인간, 주객의 분리가 진행됨으로써 그리스적 이성은 곧 인간 자아의 주체적 이성으로 치환 된다.
근세 이성주의 (rationalism)의 선구격인 데가르트(R.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는 확실성의 기초가 더 이상 신적 존재가 아닌 '생각하는 나' 즉 이성적 사유 주체로서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보편적 도덕법의 존재 및 그 실천의 필 연성을 논증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완성 가능성을 꿈꾼 칸트(I. Kant)의 도덕철학 또한 인간성 내부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자율 능력으로서 실천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 성립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다시피 동서양의 고전 고대 사상에서 근세 이성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성주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사상들은 대부분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 성격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갖고 있고, 그것은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으로건 종교적으로건 선천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특히 서양의 이성주의적 전통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성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02. 인간의 합리적 · 사회적 본성(2-3. 공리주의)
그러나 인간 본성이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위한 적극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입장은, 이상에서처럼 이성주의 전통에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굳이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삶을 경험적으로 잘 헤아려 보면 인간이 그런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사회를 잘 꾸려 나가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표명하는 대표적인 입장이 곧 철학사적으로 경험주의(empiricism)와 쾌락주의(hedonism) 전통으로 분류되고 있는 공리주의 (utilitarianism)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우선 인간성이 선천적인지 아닌지,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그것은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모두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성의 기본은 쾌락의 추구이다. 이처럼 공리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 심리에 대한 쾌락주의적 전제 위에서 출발 한다.
공리주의의 이러한 출발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공리주의적 이해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부터 생기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 각자의 쾌락 추구는 서로 간 에 상충하기 마련이고, 그 상충은 사람들 간에 이기적 갈등과 반목을 불러일으 키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은 비록 쾌락을 행위 동 기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을지라도 그 행위 과정에 인간의 합리적·사회적 특성 이 깊숙히 매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되 쾌락을 늘리 려는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키면 그것이 나에게도 결코 쾌락 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적 삶의 과정에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 다. 예컨대 흔한 예로,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 새치기를 하면 그때는 편해도 나중에 남이 새치기하면 자기도 불편하므로 결국 줄 서는 것이 나는 물론 우리 모 두에게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나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효용이 있는 것임을 인간이라면 경험적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에는 이렇게 경험적으로 체득된 합리적 사회성의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터득한 원리가 곧 공리주의의 대성자 벤담(J. Bentham)이 말하는 효용 의 원리 (the principle of utility)이다. 즉 벤담은 사회 협동체 내에서 인간성의 구조 가 필연적으로 효용의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쾌락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관계자의 쾌락까지 포함하는 공중적 쾌락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한, 사회 협동체 내에서 비록 서로가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능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그러한 인간 특성에 부합하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적 · 도덕적 선이다.
요컨대 쾌락 추구라는 이기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도덕적 행위 양태 속에 수용하고자 하는 벤담과 밀(J.S. Mill)의 공리주의 사상은 자유방임적인 이기적 이윤 추구가 곧 국가적 부의 증대로 여겨졌던 당시 영국 자본주의의 낙관적인 전개 상황에서 성립된 사상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초기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는 이내 사회적 빈부 격차의 심화와 그에 따른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한계에 부딪히고 급기야 사회주의 사상을 태동하는 배경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공리주의 인간관은 효용의 원리에서 보여지듯 벤담 자신이 살던 초기 자유방임주의 시대 영국인들이 누리고 있었던 사회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리주의는 자유주의 (liberalism) 사상으로서 이기심의 공존 가능성을 기초 지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사상인 까닭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윤리 사상 대부분은 공리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